293이거산 X 현실적 사랑주의자

'현실적 사랑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음악 만드는 이거산 입니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출마의 변

출마의 변

습작청년 이거산 2014. 4. 2. 16:01
         



                





출마의 변

 

 

관악 사선거구 구의원 예비후보로 나온 86년 청년 후보 이거산 입니다. 학력을 쓰자면 고등학교 까지가 전부이기에 딱히 볼 것도 없으며 관악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서 과연 구의원 후보로 적합한 사람일까 생각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거기에 어린 친구이기 때문에 과연 이 친구를 믿고 의원직을 맡길 수 있을까 싶을 거라는 생각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관악에서도 제가 출마한 신원동은 19639월 용산해방촌 철거민 239가구가 이주했던 곳으로 승리촌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원동, 서림동 까지 포함하여 현재 사선거구의 3구역의 동은 젊은 세대의 입주자들이 단기적으로 머물다가 떠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장을 옮기게 되어 떠나가거나, 보증금이 올라가서 떠나가거나, 시설이나 안전의 취약으로 인해 다른 곳을 찾게 되거나 하는 이유로 금새 떠나가는 분들의 모습을 흔히 찾을 수 있습니다. 저 또한 보증금 200에 월세 15만원의 옥탑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올해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보증금이 오르거나 월세가 많이 오르면 근처의 옥탑과 반지하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서 쉬지 않고 계속 일을 했습니다. 십장출신이기도 한 건축일로 꽤 많은 돈을 모았던 아버지가 IMF이후 친구들이 자꾸 떠나가는 것에 충격을 받고 알콜중독에 빠져 그 후로 집안이 많이 기울면서 어머니 까지 별거로 집을 떠나 장남으로서 가장이 되었습니다. 술 취해 쓰러진 아버지를 모셔오고 알바를 하고 생계를 유지하고 반복되는 시간들을 보내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돈만 밝히는 대학의 종이 쪼가리에 불과한 졸업장을 한 장 얻기 위해서 청춘을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즐겁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20대 초반 밴드 오디션을 보고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생계는 알바지만 틈틈이 노래를 만들고 공연도 했습니다. 그때 오디션으로 만난 형들의 계기로 관악에 처음 인연이 되었습니다. 서울대입구역 인근 우체국 건물 지하에서 퇴근 후 밤늦게 까지 연습하고 같이 밴드를 하는 형들에게 노래를 만들고 연주를 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권투선수였던 아버지는 어린 시절 키가 상대적으로 크셔서 작은 키의 선수들과 체중을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체중을 감량해야하는 악조건에서 그다지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꿈을 포기 한 뒤 건축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아파트를 본인 명의로 구입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첫아들로 저를 세상에 빛 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커가면서 본인명의의 집은 빛 더미에 올라 강제경매로 집이 넘어가게 되어서 20년간 살던 집을 아들과 함께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자가 주택에서, 전세에서, 월세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기록적인 태풍이 휩쓰는 날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가정불화로 별거를 한 어머니가 일을 하면서 아버지 명의로 돌려쓴 카드 값과 대출은 고스란히 이십대의 짐이 되었습니다.

  생계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인력소에 나가 일용직을 하고 아시바를 타거나, 본드를 바르거나, 계단청소 용역회사에서, 우편집중국 비정규직 대무 직원, 시청 앞 프라자 호텔에서 연회장 웨이터로, 여러 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물류센터와 창고관리, 틈틈이 주변 아는 지인들이 운영하는 쇼핑몰이나 식당에서. 그렇지만 틈틈이 노래를 만들면서 작곡가 겸 음악가로서 저의 노래를 만들어 왔습니다. 살아생전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바라는 소원은 당신의 자식들이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한 꿈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스물아홉. 대학을 가지는 않았지만 제가 하고자 하는 꿈을 어느 정도는 이뤘습니다. 비록 그것이 돈으로 보상받을 수 있는 일이지 않더라도 제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이나 목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신념 있는 음악을 만들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저 꾸준히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생계는 수많은 청년들과 같이 비정규직의 일자리에서 노동소득으로 먹고 살고자 합니다만, 저에게는 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살아오면서 느꼈던 슬픔과 파괴되어가는 삶에 대한 투쟁에 저 또한 힘을 모으는 일입니다. 삶이 피폐해지고 가난해지면서 겪었던 경험들. 지금도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불행한 이들이 사는 곳은 절대로 행복한 공간이 될 수 없습니다. 슬픔은 전염되기 마련입니다. 우울증의 환자를 돌보다가 우울증에 걸린 심리 치료사처럼 수많은 사회 복지사들이 자살충동과 절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제 아무리 정돈된 공간일지라도 싸늘한 기억이 남은

 공간에 제 아무리 쉬쉬해도 발걸음이 끊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어린 동생에게 기타를 쥐어주고 F코드를 가르쳐 주던 같이 음악을 하는 형들. 그리고 동생의 불합리한 일에 항상 가족처럼 신경써주고 해결해주던 통합 진보당 관악 당원 형들 누나들, 그분들께 받은 사랑만큼 따듯하고 아름다운 관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잠시 머물고 떠나는 기억이 

아니라, 사랑하고 행복한 청춘의 기억이 가득한 곳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의 시간들을 지역과 세입자를 위하여 고민하고 행동하고 싶습니다.

평소 아버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저에게 항상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아버지는 아버지라고, 삶이 얼마나 퍽퍽하고 

어찌되었건 저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원동의 주민입니다. 누구보다도 제가 살아가는 곳을 더 사랑하도록, 어느 나라보다 더

매료되도록 끊임없이 구애하는 마음으로 도전하겠습니다.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청년일지라도 맨몸 하나 가지고 도전하겠습니다선거자금도 선거 인력도 아무것도 없지만

 저에게는 진심이 있습니다통합 진보당 사선거구 구의원 예비후보 이거산으로 인사 드립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